그 시절엔 이 땅이 칠면조 요리 덮개 같은 천구에 덮여 있었다. 그 때 사람들은 덮개 너머에 있는 찬란한 세계의 빛이 천구에 송송 뚫린 구멍틈으로 새어 나오는 게 별이라 생각했다. 물론 더 똑똑한 사람도 있었다. 그리스의 한 철학자는 별이란 허공에 떠 있는 무지무지하게 큰 못생긴 돌덩어리라고 했다. 그가 왜 굳이 시대에 걸맞지 않은 이야기로 분위기를 깨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다행히 그의 심술도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놓진 못했던 것 같다.


 - 진중권, 미학오디세이1권 中







어린 시절 꿈꾸던 찬란한 우주





 7살 때로 기억합니다. 외삼촌 댁에 놀러갔을 때였죠. 과자 먹으며 만화책 보던 저를 불러 앉히시곤 '이 영화는 꼭 봐야 한단다.' 그렇게 스타워즈와 첫번째 연을 맺게 됩니다.



 스타워즈 하면 참 많은게 떠오릅니다. 이야기 자체도 매력적이었고 화면 가득히 펼쳐졌던 우주선들, 격렬한 전투, '레이자 총' 을 제압하는 '레이자 칼', 하나하나 어린시절의 제가 꿈꿔왔던 모습들이었죠.




 하지만 역시 가장 기억에 남는건 제다이네요. 긴 기간동안 수도없이 재방송으로 틀어줬던 스타워즈 시리들을 찬찬히 다시보면 볼수록, 제다이 기사들이란 참 매력적인 녀석들이구나 생각하게 되었죠. 중요한 순간마다 발휘되는 그들의 '뽀쓰'가 너무너무 부러웠습니다. 후일 에피소드 1,2,3가 개봉되었을 때, 메카닉 설정이나 세계관이 예전과 달라 혼란스럽긴 했지만 여전히 이야기의 핵심엔 제다이 기사들이 있었죠. 정말로 반갑더군요.



 최근의 스타워즈는 기존 것들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제다이들인 아나킨, 오비완, 요다 등의 갈등요소가 많이 부각되었죠. 아나킨이 다스베이더로 재탄생 하는 과정이 주된 이야기 흐름이었던 만큼 어린시절에 보기엔 완벽해 보이기만 했던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많이 보여주더군요. 영화 포스팅이 아닌만큼 자세히 언급하진 않겠지만 여러분 모두 과거보단 훨씬 우리와 비슷해 보이던 제다이들을 기억하실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들은 제다이였죠. 단 한명만 있어도 주변을 제압할 수 있는 능력자들이었죠. 그들은 여전히 '평범하지 않고 특별하기에 멋있어 보였던' 제다이 기사였습니다. 우리가 어렸던 시절 꿈꾸었던 우주는 아무리 위험해보여도 자신의 특별함을 믿었기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브 온라인 (EVE-Online)



 이제 이브 온라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그전에 우리는 왜 RPG를 하는 걸까요. 다들 아시겠지만 Role Playing Game은 뭔가 지금 우리의 모습과는 다른 역할을 경험하는 게임입니다. 우린 전사가 되기도 하고 왕이 되기도 하고 이상하게 전 남자지만 공주(!!)가 되어보기도 합니다.







 현실에서 꿈꾸면 황당하기도 하고 친한 친구에게라도 '나 가끔씩은 전사가 되어서 괴물들을 무찌르고 싶어져, 기왕이면 공주 출신 여전사가 좋을 것 같아' 라고 말하긴 부끄러워서 손발이 오그라들겠지만 RPG가 있기에 우린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지요. 오호라! 마침 우린 시대를 잘 만나 인터넷이란 신기한 도구가 있네요. MMORPG를 통해서 그런 새로운 역할을 하는 사람들 끼리 모여 더욱 새로운 경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죠 바로 그겁니다. RPG를 통해 현실의 우리완 다른 역할을 하며 놀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농부'가 되어본다던가, '회사원'이 되어본다던가, '수험생'이 되어본다던가 하는 RPG는 없습니다. 새로운 역할을 경험해 본다 해도 좀 많이 특별해서 남들과는 확연히 다를 우월한 존재가 되는 경험을 하고 싶어합니다.



 오늘 말해 보려하는 EVE-Online은 바로 이런점에서 특이합니다. 먼저 이브의 화면을 좀 살펴보죠.






어떠십니까? 솔직히 순진했던 전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오오오오오오 스타워즈처럼 우주를 배경으로 영웅놀이 할 수 있는 걸까!!!!"


매우 큰 기대를 가지고 게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의욕이 넘치게 공식 홈페이지(
http://www.eveonline.com/)에 접속해서 계정을 생성하곤 클라이언트 다운로드. 아아 오래 걸린다 빨리 좀 와라. 굿굿 설치시작, 접속, 오프닝 시작!


 ......뭔가 이상한데


 저는 농부, 회사원, 수험생이 되는 경험을 하는게 내키지 않는 만큼이나 살아남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는 난민이 되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브는 시작부터 못을 박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패망한뒤 종족절멸의 상황을 간신히 넘긴 인류의 후예입니다. 워낙에 고생들을 많이해서 '저쪽별에 착륙했던 애들도 있었는데...' 같은 상황은 까맣게 잊고 맙니다. 혹독한 환경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또다시 영겁의 시간이 흘러 자체적으로 우주를 항해할 능력을 개발하고 돌아다녀 보니 저쪽별 출신들 역시 독자적인 국가와 문화를 구축해 우주를 돌아다니기 시작한 걸 발견합니다. 이제 힘들었던 시간은 다 끝나고 오랜 단절의 종식을 고하며 형제끼리 얼싸안으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작된 것은 전쟁입니다. 이유도 많이 들어본 것들이죠. 종교가 달라서, 부족한 인력을 노예로 매꾸기 위해, 노예 신분을 탈피하기 위해, 상대의 자원을 노리고 있어서.....


 많이 찝찝하지만 나름 현실성있는 설정이니 인정해 주기로 합니다. 그런 뒤 플레이를 해보면 어딘가 더더욱 이상합니다.


 시간이 아무리 흐르고 열심히 게임을 해도 여전히 여러분은 지나가던 행인A에 불과합니다. 타게임 처럼 지나가던 저레벨A를 괴롭히는 만렙영웅은 될 수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한데 이브에는 레벨이 없기 때문입니다. 에이 설마 그래도 게임 플레이 시간이 쌓이면 뭔가 남들보다 강해지는 무언가는 있겠지. 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점점 상승하는 Skill 개념은 있습니다. 또한 크고 아름다운 함선을 운용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모든 Skill을 마스터 할 순 없습니다. 어느걸 선택하면 다른건 포기해야 합니다. 최강의 스킬트리가 있지 않을까? 잘라 말씀드리지만 없습니다. 자신이 운용하고 싶은 함선, 자신이 플레이하고 싶은 패턴을 정한 뒤 그 방면의 스페셜리스트가 될 순 있지만 이것도 할줄 알고 저것도 잘할 순 없습니다. 반드시 어딘가엔 여러분을 손쉽게 잡아낼 수 있는 스페셜리스트가 존재합니다. 2년에 걸쳐 정말 대단한 T2급 함선을 만들었다고 해도 시작한지 2주 된 사람의 손에 의해 격침되는 것도 가능한 일입니다. 


 
대체 이게 뭐야? 이런 게임이 뭐가 재미있어? 어서 빨리 나에게 '레이자 칼'을 줘!!!




무지무지하게 큰 못생긴 돌덩어리들





 하지만 이로인해 의외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절대로 뛰어날 수 없는 개인들만 모여있는 서버에선 현실보다도 더욱 현실적인 모양새가 이루어집니다. 개인은 정말 아무런 힘이 없지만 각 방면의 개성이 있는 유저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면 훌륭한 군대로 작용하게 됩니다. 전쟁 역시 한두명의 영웅이 판가름 하지 못하며 우리군대가 얼마나 좋은 팀웍을 가지고 있는지, 서로의 단점을 얼마나 잘 보완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때문에 아무리 유명한 콥(Corp=회사, 이브의 길드와 비슷한 개념)의 군대라 해도 허접한 나와 내친구들이 맥없이 무너지지 않고 대등하게 맞설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평등하다면 그 누구의 앞에서도 쫄 이유가 없습니다.


 고레벨과 좋은 아이템, 화려한 외양과 기나긴 칭호. 대부분의 MMORPG는 오래 플레이한 유저들에게 특별한 강함을 부여하여 보상을 해줍니다. 사실 현실에서 힘들게 하루하루 직장생활 하며 열심히 사는 이들에게 그런 특별함은 너무나 큰 매력입니다. 최근 이곳저곳 게임 이야기가 논의되는 공간들에서 '이브는 정말 잘 만들었고 재미난 게임이다. 무지한 중생들아. 국산 MMORPG와 블리자드의 우물에 갖혀있지 말고 이브를 경험해보라!' 라는 식의 글이 조금씩 보이고 있습니다.


 글쎄요 저는 추천해드려야 할지 판단하기가 어렵네요. 여러분이 이브를 하면 할수록 개인의 힘은 무력하다는 걸 깨달을 수 밖에 없습니다. 과연 피곤한 현실을 겪고 집으로 돌아온 뒤 더더욱 냉혹한 세상에 참여하고 싶어질까요? 과연 그게 재미있을까요?


 그렇지만 뒤집어 생각할 수 도 있습니다. 이곳에선 상대가 긁어모은 재산이나 권력에 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속한 집단과의 끈끈한 연대가 있으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은 곳입니다. 이제 장막이 걷히고 어린 시절 아름다운 환상으로 가득찼던 우주의 대부분이 크고 못생긴 소행성 투성이 인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낙심할 필요는 없어보입니다.





Posted by 이율배반